8조5000억원(65억4000만 달러)을

마지막 업데이트: 2022년 2월 10일 | 0개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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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율을 어떤 기업이나 개인이 조작할 수 있을까?

유튜브 방송을 듣던 시청자가 “어떤 기업이 자신에 유리하게 환율을 조작할 수 있는가”라고 질문을 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경제 규모가 작을 때는 모르지만 지금처럼 경제규모가 8조5000억원(65억4000만 달러)을 컸을 때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대답을 하는 이유는 아래의 ‘그림’을 통해 충분히 설명이 된다. 아래 ‘그림’에서 경상수지는 파란 선으로 표시되어 있고, 달러에 대한 원화 환율은 붉은 선인데 1997년 이전에는 이 두 변수가 매우 강한 연관을 맺고 있었다.

쉽게 이야기해, 경상수지 흑자가 나면 환율이 떨어질 가능성이 높고 반대로 경상수지가 악화되면 환율이 상승했다. 경상수지의 외환시장 영향력이 컸던 이유는 주식시장에 대한 외국인의 접근이 제약되는 등 우리나라 금융시장 문이 외부에 닫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 금융시장이 개방된 다음에는 경상수지와 환율의 연관은 매우 약해졌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2015년이다. 당시 1059억 달러의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했지만, 그 해 연말 달러에 대한 원화 환율은 1175원까지 급등했다. 이런 기현상이 벌어진 이유는 외국인 투자자의 대규모 주식 매도 때문이었다. 아래 ‘그림’의 파란 선은 외국인의 주식 순매수(누적)를 의미하며, 붉은 선은 달러에 대한 원화 환율을 표시한다. 2015년 5월부터 12월 사이 외국인 투자자들이 13조8000억원을 매도하는 사이, 달러에 대한 원화 환율은 1072원에서 1175원까지 상승했다. 물론 2018년에도 마찬가지로, 외국인이 1~10월 중 6조2000억원을 매도하는 가운데 달러에 대한 원화 환율은 1067원에서 1140원까지 상승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바로 ‘글로벌 금융시장’의 규모가 거대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2017년 기준 글로벌 연기금의 자산은 45조 달러이며, 보험이나 뮤추얼 펀드 등 다른 운용자산까지 포괄할 경우 글로벌 자산 운용 규모는 132조 달러에 이른다.* 참고로 한국 GDP 규모가 1조5000억 달러 수준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글로벌 운용 자산규모가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달러에 대한 원화 환율은 외국인 투자자들이 한국 등 이머징 시장에 투자를 시작할 때 떨어지며 반대로 외국인 투자자들이 이머징 시장에서 자금을 회수할 때 상승한다. 물론 이 모든 움직임을 좌우하는 것은 결국 글로벌 달러가치의 흐름에 달려 있다. 아래의 ‘그림’에 잘 나타난 것처럼, 달러강세는 신흥국(EM)과 선진국(DM) 자산 수익률의 흐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변수이기 때문이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달러에 대한 원화 환율을 결정짓는 요소는 ‘글로벌 자금의 이동 방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달러의 가치 변화 방향이다. 달러가 강세를 보일 때에는 미국 등 선진시장으로 자금이 이동하며, 반대로 달러가 약세를 보일 때에는 한국과 중국을 비롯한 신흥시장으로 돈이 움직인다. 이런 금융 및 외환시장의 흐름을 감안할 때, 개인 혹은 기업이 환율의 방향 및 수준을 결정지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외환 상인에 대한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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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은행권의 이상 외환거래 규모가 8조5000억원(65억4000만 달러)을 넘어선 것으로 파악됐다. 금융감독원은 우리은행, 신한은행 외에 거액의 해외송금 정황이 포착된 은행에 대해서도 추가 검사를 실시한다는 방침이다.

금감원은 우리은행과 신한은행을 포함한 은행권의 이상 외환거래 규모는 총 65억4000만 달러(약 8조5000억원)로 집계됐다고 14일 밝혔다. 금감원에 따르면 우리은행, 신한은행 현장검사를 통해 확인된 금액은 33억9000만 달러(4조4723억원)이며, 각 은행이 자체 점검을 통해 발견한 이상 외환송금 의심거래 규모는 31억5000만 달러(약 4조1000억원)다.

의심거래는 가상자산 거래소와 연계된 은행으로부터의 입금 거래가 빈번했다. 가상자산 투기 세력이 가담한 것으로 의심되는 대목이다. 또한 법인은 서로 다른데 대표가 동일하거나 사무실 위치, 직원이 중복되는 등 업체 실체가 불분명한 경우가 많았다. 거래 당사자 외 제3자 송금 시 한국은행에 신고해야 하는 외국환거래법을 따르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앞서 금감원이 이상 외환송금 검사 중간 결과를 발표할 당시, 대부분 거래가 국내 가상자산 거래소에서 다수의 무역법인 계좌로 자금이 이체된 후 수입대금 지급 명목으로 해외 법인에 송금되는 구조였다고 설명했다. 국내 법인의 경우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설 업체가 많았고, 귀금속을 취급하는 기업의 송금 액수가 가장 많았다. 송금처가 된 해외 법인은 가상자산 거래소가 아닌 일반 기업이었고, 홍콩과 일본, 미국, 중국 소재였다. 홍콩 법인에 송금된 금액이 25억 달러(약 3조2800억원)로 가장 많았다.

이복현 금감원장은 지난달 28일 국회 정무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이상 해외송금 사건에서 서류 조작 가능성이 있느냐”는 강민국 국민의힘 의원 질의에 “불법성이 명확해 보이고 그 8조5000억원(65억4000만 달러)을 과정에서 대량 외환 유동성의 해외 유출이 확인됐다”고 말했다.

금감원은 우리은행과 신한은행에 대한 검사를 오는 19일에 종료할 예정이나, 필요 시 연장한다는 방침이다. 이와함께 이상 외환송금 의심거래가 파악된 타 은행에 대해서도 추가 검사를 실시한다는 계획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검사 결과 확인된 위법 '부당 행위에 대해서는 관련 법규, 절차에 따라 엄중 조치할 계획”이라며 “필요시 관련 내용을 유관기관과 공유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외국인의 국내 주식 보유 비중이 13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14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지난 11일 기준 유가증권시장(코스피) 전체 시총은 1천986조8천억원, 이 가운데 외국인 보유 주식 시총은 606조2천억원이었다.

시총 기준 외국인의 보유 주식 비중은 30.51%로 올해 최저치를 기록했다. 2009년 8월 13일(30.52%) 이후 13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이기도 하다.

올해 초 코스피 시총에서 외국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33.50%로 출발했다.

1월 25일 LG에너지솔루션의 상장 영향으로 34.20%까지 오르며 연고점을 찍었으나, 이후 줄곧 감소세를 보였다.

6월 중순까지 31%대를 유지하던 외국인 시총 비중은 코스피 급락에 따라 6월 16일 30.99%로 내려왔다가 지난달 21일 31.23%까지 회복했다. 그러나 지난달 29일부터는 줄곧 30%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가장 최근 거래일인 이달 12일 외국인 시총 비중은 30.56%이었다.

최근 코스피가 일부 회복세를 보이며 반등을 시도하고 있으나, 국내 증시에 대한 외국인 투자자의 기대감은 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코스피는 지난달 6일 종가 기준 2,292.01까지 내려갔다가 이달 12일 2,527.94로 마감하며 10.29% 올랐다.

코스피가 상승세를 보인 것에 발맞춰 외국인은 지난달 유가증권시장에서 2조5천억원을 순매수해 6월(5조4천억원 순매도)과 달리 순매수세로 전환했다. 이달도 1조8천억원 매수 우위다. 그러나 올해 초부터 이달 12일까지 외국인은 유가증권시장에서 10조6천억원을 순매도해 전체적으로 매도 우위인 상태다.

연초부터 글로벌 증시가 불안한 상태를 이어오며 위험자산을 회피하는 심리가 커졌을 뿐만 아니라, 원화 약세와 한미 금리 역전까지 가세해 외국인에 대한 코스피의 매력도는 떨어졌다.

전문가들은 최근 코스피 반등을 `베어마켓 랠리`(약세장 속 일시적 상승)로 평가하면서, 경기 침체 가능성이 꺼지지 않는 한 코스피는 언제든 재차 하락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8월 들어서 순매수 강도 약해져
美 고강도 긴축 우려 여전한 탓

외국인투자자들이 보유한 유가증권시장의 시가총액 비중이 13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감소했다. 지난달 거셌던 매수세도 이달 들어 다소 주춤하면서 외국인의 '바이 코리아'가 약해지는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다. 외국인은 지난달 상장주식 2450억원을 사들였다. 7개월 만에 순매수다.

14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지난 11일 기준 유가증권시장의 시총은 1986조8000억원으로 집계됐다. 이 중 외국인이 보유한 시총은 606조2000억원이다. 전체 시총에서 외국인 보유분을 비율로 환산하면 30.51%다. 2009년 8월 13일(30.52%) 이후 13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이다.

앞서 올해 1월 25일 외국인의 시가총액 비중은 LG에너지솔루션 상장 영향으로 34.2%까지 오르면서 연고점을 찍었지만 이후 꾸준히 감소했다. 지난달 외국인은 7개월 만에 순매수로 돌아섰으나 연초 기준으로 보면 여전히 매도 우위다. 올해 초부터 이달 12일까지 외국인은 유가증권 시장에서 10조6000억원어치 넘게 팔았다.

다만 지난달부터 외국인은 조금씩 국내주식을 사들이고 있다.

금융감독원이 지난 12일 발표한 2022년 7월 외국인 증권투자 동향에 따르면 외국인은 지난달 상장주식 2450억원을 순매수했다. 유가증권시장에서 1조1310억원을 순매수한 반면, 코스닥시장에선 8860억원을 순매도했다.

지난달 기준 외국인의 상장주식 보유액은 전월 대비 36조7000억원 증가한 630조4000억원이다. 시가총액의 26.4%를 차지했다.

채권시장에서도 지난달 외국인은 총 3조 5610억원을 순투자했다. 6월 순회수(9340억원)를 기록한 지 한 달 만에 국내로 자금을 들여왔다.

8월 들어서도 외국인은 순매수 기조를 이어가고 있다. 외국인은 이달 들어 12일까지 1조8198억원의 순매수를 기록했다. 8월 첫째주에는 1조6756억원 가까이 사들였지만 둘째주에는 1530억원으로 순매수 강도가 크게 약해졌다.

이 기간 외국인이 가장 많이 사들인 종목은 LG에너지솔루션으로 2076억원어치를 순매수했다. 이어 삼성SDI(1820억원)과 현대차(1465억원),셀트리온(903억원), 두산에너빌리티(873억원) 등의 순이다. 반면 삼성전자는 5278억원을 순매도, 가장 많이 팔아치웠다. 이어 HMM(-534억원)과 에코프로비엠 (-479억원), LG이노텍(-478억원), 고려아연(-453억원) 등의 순으로 집계됐다.

미국 소비자물가지수와 생산자물가지수의 하락세가 인플레이션 정점 통과 가능성을 구체화하는데 일조하면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아직 미국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고강도 긴축에 대한 시장 우려가 남아 있어 멀티플 확장에 기반한 주가 상승은 긴축적 금융 여건에서 힘들 것이란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서정훈 삼성증권 연구원은 "성장주 반등이 오래 가는 것은 녹록치 않은 환경이라는 의미"라며 "안도 랠리 과정에서 이들의 상승세가 확인된 경우라면 지속적인 보유보다는 리밸런싱 대상으로 상정하는 것이 옳고 금리인하 신호가 더욱 명확해질 때를 기다려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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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내용

국제경제는 국제수지·무역정책·외환론·국제경제협력 등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개념이다. 우리 나라에는 문호개방 이전에도 무역거래를 중심으로 어느 정도 국제경제가 존재하였으나, 대부분 물물교환 형식을 취하고 있었고, 교역대상도 중국이나 일본으로 크게 제한되어 있었다. 자본거래·외환문제 등의 복합적인 문제가 중요 경제문제로 등장한 것은 문호개방 이후였다.

그리하여 국제경제 발달은 개항 이전, 개항 이후부터 광복 이전, 광복 이후로 나눌 수 있다. 구체적인 내용으로는 무역정책·외환정책·국제수지 등이 있으며, 특히 국제수지에는 무역수지·무역외수지·이전수지·장단기자본수지 등이 중요 요소로서 논의된다.

우리 나라 국제경제 관계는 1980년대 이전까지는 국제시장에서 원료, 상품, 자본을 차입하고, 상품을 수출하는 수준이었으나, 1980년대를 전환기로 하여 적극적으로 국제경제 협력차원의 국제경제관계도 크게 확대되었다.

부족사회의 대외무역은 정치형태와 함께 발달하였다. 기원전 7세기에 고조선은 이미 제나라와 무역하였으며, 부족국가 발전기인 부여 및 삼한시대에는 한층 더 발전하여 서기 전후에는 중국의 한족과 사무역까지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집권 체제를 확립한 삼국시대의 고구려에서는 나라가 부강해짐에 따라 귀족의 사치품 수요가 증가하여 능동적으로 중국과 통상을 추진했는데, 특히 472년(장수왕 60) 위(魏)나라에 조공한 이후 공무역이 크게 증가하였다. 또한 일본과도 공무역을 하여 철적(鐵的)·황금 등을 수출하고, 일본의 토산물을 수입하여 문화 전파 구실도 하였다.

백제도 고구려·신라뿐만 아니라 중국의 남조(南朝) 여러 나라 및 일본과도 공무역을 하였으며, 신라는 대륙과 지리적 조건이 좋지 않아 비교적 늦게 무역을 추진했으나, 통일 뒤 신라의 외교사절과 상인들은 사신들이 유숙하는 신라관(新羅館)에서뿐만 아니라 당나라의 서울 장안(長安)에 이르는 노상에서도 교역하였다.

나아가 해운의 발달과 자본의 축적으로 상인이 해외로 진출하는 경향도 두드러졌는데, 특히 9세기 중엽 장보고(張保皐)는 황해와 동지나해의 무역권을 장악할 정도로 거부가 되어, 회역사(回易使)라는 무역사절을 자주 일본에 파견하여 중계무역을 하는 등 대일·대당 무역을 독점하다시피 하였다.

당시의 무역품은 대부분 귀족의 사치품이었으며, 특히 수출품에 고급공예품이 많이 포함되었고, 동남아시아 열대지방에서 산출되는 향료와 염료도 중국의 중계로 수입되었다. 삼국은 모두 일본과의 교역에서는 상업적 교역뿐만 아니라 문화의 전파자로서 일본 문화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대륙과의 무역은 고려시대에 와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송나라와의 무역이 중심이었는데 생산력의 발전, 항해술의 발달, 송나라의 중상정책 등으로 고려·송나라간의 공무역·사 무역이 모두 크게 발달하였다.

공무역은 조공의 형식을 취한 사절무역이었고, 사무역은 현종 때부터 성행되었는데 정식으로 들어온 송상(宋商)은 일종의 관허(官許) 민간상인이었다. 또, 허가없이 입국하여 금제품(禁制品) 등을 판매하는 밀무역자도 많았다.

그 밖에 거란·여진·몽고·일본 등과의 무역도 있었지만 그리 활발하지 않았고, 특이하게 1024년(현종 15) 사라센제국의 편력(遍歷)상인들이 들어와 수은·대소목(大蘇木) 등 유럽 특산물을 중계하였다.

그러나 무역관계는 쇄국정책과 상공업 천시의 기풍으로 무역전반이 국가의 직접적인 관리 아래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상대국의 의분을 사지 않는 한도 내에서 가급적 통제 내지 억압하고 있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에 들어 와서는 국경 인접지역에 외국과 쌍방의 시장이 개설되어 일반 상인은 물론 국민 일반의 대외무역까지도 허용되었는데, 이는 그 동안 존립을 부정당했던 사무역의 부활로서 국제간의 지리적 및 사회적 생산력의 불균형을 보전하게 하는 요소가 되었다.

18세기부터 국경무역의 하나인 책문후시(柵門後市)가 크게 번영함에 따라 정부는 그것을 단속할 수 없게 되자, 1754년(영조 30)에 이르러 책문후시를 공인함과 동시에 그들에게 관세를 부과하였다.

1876년 강화조약(江華條約)으로 전통적 대외무역은 근대적 대외무역 관계로 급속히 전환되어 갔다. 1883년까지는 일본의 독점기로서 무관세통상조약(無關稅通商條約)을 체결하여 우리 나라와의 무역을 독점하고 있었고, 청나라와는 국경지방을 중심으로 전근대적인 공무역이 이루어졌을 뿐이며, 구미제국과는 재류자를 중심으로 약간의 무역이 있었을 뿐이었다.

1884∼1894년까지는 청·일 양국 간의 치열한 무역 경쟁기였다. 1882년에 ‘조청상민 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이 체결되어 조청무역관계가 개항장에서 근대적인 무역관계로 전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10년 일본의 국권침탈로 우리 나라는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광복 이전까지는 일본의 상품시장, 식량과 원료의 공급지로서 일제에게 일방적 희생을 강요당하는 식민지무역 상태에 있었다. 식민지 시기 일본은 자국의 무역이익을 위하여 관세제도·무역금융·외국환정책 등을 사용하여 우리의 제3국 무역을 철저히 통제하였다.

광복 직후부터 1948년 정부수립에 이르기까지의 대외무역은 군정 및 과도 정부당국의 철저한 통제 아래 있었다. 광복 뒤 대외무역에 관한 법령이 처음으로 발포된 것은 1946년 1월 군정법령 제39호 「대외무역규칙」으로 대외거래의 허가제를 규정하였다.

그 뒤에도 계속적인 통제무역으로 일관되어 무역면허제, 수출입 품목의 허가·장려·금지 등의 통제, 수출입 품목의 가격통제, 외국자본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한 물물교환제도의 법제화 등이 있었다.

6·25전쟁 종결 뒤부터 1961년까지는 외국의 원조에 의한 전쟁피해 복구기간으로 총무역 수입 가운데 원조의 비중이 70% 정도를 차지하였으며, 수입·수출 규모는 각기 국민총생산의 20%와 2%이고, 무역상대국은 미국과 일본에 편중되었으나 수출은 미국 비중이 증대되었고 수입은 일본 비중이 컸다.

그 결과 1960년대 우리 나라 무역은 수출이 연평균 41.1%라는 놀라운 신장률을 보였지만 수입 역시 연평균 21.9%의 신장률을 나타내었다. 따라서, 1960년대의 무역정책은 수출증진과 수입억제를 통한 무역수지의 개선에 주요 목표를 두었다.

1962년 3월 「수출진흥법」을 공포하여 수출품제조용 원료수입에 대한 특혜조처, 해외무역활동의 보장, 실적주의에 의한 수입허가의 제한강화 및 연대보증에 의한 무역금융의 대출 등을 규정하였다.

그리고 1963년 「관세법」을 개정하여 덤핑방지관세·보복관세제도 등을 신설하였다. 1965년 이후에는 간접통제방식으로 전환하여 이전의 수출보조금제도를 폐지하는 대신 수출금융의 이자율 인하와 더불어 수혜규모를 크게 확대하였다.

② 외국환정책:외국환의 관리는 1947년 6월에 조선환금은행(朝鮮換金銀行)이 설립되어 정부의 지시 또는 관계규정에 따라 외국환 관리업무를 담당하였고, 1950년 「한국은행법」에 따라 한국은행이 담당하다가 1962년 「외국환관리법」이 공포되면서 일반 은행과 외환은행이 다같이 취급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외환업무 취급기구도 확대, 다원화되었다.

외국환의 관리방식은 1961년까지는 완전히 환금은행 또는 한국은행의 매상(買上) 및 예치집중제도(預置集中制度)만을 채택하다가, 1961년부터는 거주자와 비거주자를 분리하여 관리하였고, 1964년 「외국환관리규정」에 의하여 집중형태를 매상집중제·예치집중제·등록 및 보관 등 세 종류로 나누어 외교관·주한미군 등은 등록 및 보관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외국환을 수요하는 경우에는 자유·무제한 매매를 금하고 수입수요에 대해서만 각종 환율로서 적용하여 왔다. 환율은 1945년 10월 미군정 장관에 의하여 최초의 공정환율이 미화 1달러 대 15원으로 발표된 이래 매우 복잡한 변천을 거듭하였다.

1964년 5월 변동환율제가 채택될 때까지 19년간의 고정환율 제도에서 14차에 걸쳐 1만7천 배의 격등이 있었다. 그리고 환율을 구성하는 외국환의 종류도 원조불(援助弗)·종교불(宗敎弗) 등 매우 다양하며 환율도 일반 공정환율, 대충자금환율(對充資金換率), 유엔군에 대한 환율 등 복잡한 복수환율체계였다.

1964년 단일변동환율제로 변경하여 실세환율 수준을 유지함으로써 수입촉진, 수출저해의 역효과를 방지하려 하였다. 즉, 대외거래에서 경제활동을 가격기구에 의하여 움직이게 하려는 자유화정책의 하나였다.

그리하여 1968년까지는 환율변동이 거의 없었으나 1973년 제1차 석유파동 등으로 무역수지 역조가 심화되어 그에 대한 대책으로 1974년 12월 구매가격 평가와 환율 사이의 격차를 해소하고 수출상품의 대외경쟁력 제고 및 수입규제를 목적으로 한은집중률(韓銀集中率)을 399원에서 484원으로 대폭 인상하고 1979년까지 고정환율제도를 유지했다.

그러나 제2차 석유파동과 1970년대 말의 국내정치 불안으로 국제수지가 다시 악화되어, 그 동안의 고정환율을 1980년 1월에 580원으로 인상하여 환율의 실세화를 단행하였으며, 1980년 2월에는 환율의 일시적 대폭인상에 따른 경제의 충격을 회피하기 위하여 실질적인 변동환율제를 실시하였다.

이 제도는 이전까지의 환율결정을 미국 달러에만 의존하는 방식에서 탈피하여 환율의 결정을 에스디아르바스켓(SDR basket)과 우리 나라의 주요 무역상대국 통화바스켓이 결합된 복수통화바스켓에 연결시켜 시행하게 되었다.

③ 국제수지:국제수지는 무역거래·무역외거래·이전거래·자본거래 등으로 구성되는데, 1960년대 이후는 수출주도의 경제개발계획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데 중추적인 구실을 하는 대외무역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는 기간이었다.

1961년에서 1980년 사이의 무역추이는 수출이 4090만 달러에서 172억 달러로 420배 증가하였고, 수입은 2억8천3백만 달러에서 216억 달러로 70배 이상 증가하였는데, 수입증가는 대외지향적 개발전략의 진행과정에서 원자재와 자본재의 수요증가 때문이었다.

국민총생산에서 수출입 비율은 30% 미만에서 70%로 상승하였으며, 수출상품 구조상의 특색은 1960년대 1차산품 비중이 40%에서 1980년대에는 10% 정도로 낮아졌다. 무역시장도 다변화되어 1962년에는 미국·일본 중심의 33개국이었으나, 1980년대에는 미국·일본의 비중이 점차 감소되며 교역국도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하게 되었다.

공공차관은 주로 국제기구를 통하여 도입하여 사회간접자본과 농수산업에 투자되며, 상업차관은 유럽공동체 여러 나라의 도입비중이 커졌는데 주로 50% 이상이 제조업에 이용되며 농업 이용율은 적다.

기타 외국인의 현금·현물투자(자본재투자)도 증대되어왔으며, 1975년부터는 합작기업의 증가로 현금투자 비중도 높아지고 있다. 단기자본거래는 아직 자본시장이 활성화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단기무역신용과 리파이넌스를 주로 하고 있다.

또한 1990년대부터 우리 나라는 우르과이라운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및 세계무역기구(WTO) 등의 회원국이 되었는데, 국제경제협력기구는 중심주의적이고, 경제민족주의적인 경제운영을 금지시키고 국제관행을 준수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이에 따라 1960∼1970년대와 같은 수출 보조금제도, 수출금융 이자율인하, 농업보조 등과 같은 정부의 직접적인 개입 행위는 크게 제한받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국제경제기구에 가입함에 따라 우리 나라는 자본, 기술, 인력 측면에서 수혜국 입장에서 시혜국으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북한의 시장화와 ‘돈주’의 구실에 대한 보충

《마르크스21》 19호에 실린 “최근 20년 동안 북한식 ‘시장화’와 김정은 정권의 불안정”에서 김어진은 1990년대 후반 이래 추진돼 온 북한의 시장화 추세에 대한 일정한 평가를 내놓았다.

김어진은 북한의 시장화가 “소유권의 부분적 변화”나 “운영권의 실질적 사영화” 등의 방식으로 진행돼 왔으며, 그 결과 “당·군·내각에 연결된 무역회사와 기업소의 사업권 확장을 가져온 것은 사실”이지만 1 이런 시장화가 국가 관료들의 통제 하에서 진행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간단히 요약하면, “북한 관료는 배급제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북한 주민의 삶을 ‘자력갱생’에 맡겨 둬 장마당이 확대되면 다시 단속·처벌을 통해 시장확대의 이익을 일정하게 수거하고 다시 시장을 묵인·방조하고 은연중에 확대하는 방식”(121쪽)을 추진해 왔다는 것이다.

김어진은 북한 관료들의 통제 하에서 추진된 일정한 시장화가 세수 확대라는 목적을 위한 것이며(126쪽), 김정은 정권이 이렇게 확보한 재정으로 핵·경제 병진노선을 추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127쪽).

또한 김어진은 1995년 이후 군부나 당의 권력기관으로부터 ‘와크’라는 무역허가권을 받고, 각종 외화벌이 사업을 통해 부를 축적해 나가는 ‘돈주’가 형성됐는데, 이들 중 일부는 단순한 영세상인들이 아니라 합작투자를 통해 조직화(분업화)·기업화(대형화)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지적했다(111쪽).

김어진의 이와 같은 설명은 북한의 시장화와 돈주의 등장에 대한 양문수, 정은이 같은 학자들의 과도한 평가와 대비된다.

양문수는 기본적으로 2002년 7·1 조치 이후로 북한에서 시장화가 진전됐고, 그래서 “공식경제/계획경제의 비공식경제/시장경제에 대한 의존성이 심화되었다”고 주장한다. 2 물론 시장화에 따른 북한 정부의 딜레마(“경제의 숨통을 틔우고 계획경제의 토대가 와해된 상황에서 국가는 시장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지만” 3 시장화가 진전되면 빈부격차의 확대 등 정치적 부담이 증가한다는 점 때문에 시장화를 억제한다는 점)를 지적하지만 말이다. 정은이도 북한에서 시장이 형성되는 역사적 과정과 국경 지역의 회령시장 사례 연구 등을 통해 시장화가 꽤 진척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4

그럼에도 통계자료의 부족 때문에 북한 경제에서 자유시장이 포괄하는 범위에 대해 객관적 데이터를 제시하는 학자는 없다. 양문수는 탈북자 설문조사를 통해, 북한의 제조업의 20퍼센트, 무역의 40퍼센트, 서비스업의 50퍼센트를 개인위탁경영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추정한 바 있다. 5 그러나 설문조사로 북한 경제 전체에서 민간기업이 실질적으로 어느 정도를 차지하는지 그 규모를 판가름하기 힘들다. 생산 부문을 포함한 북한 경제 전체로 보면, 시장화된 영역보다는 국가가 직접 통제하거나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영역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부 북한 연구자들도 북한의 시장화가 주요 국가기관에 의해 추진되고 있고, 또 매우 제한적이라고 지적함으로써 김어진과 비슷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김병로는 “기존의 정치적 계층구조에서 기득권을 차지하고 있는 당원이 장사를 전문적으로 하는 상인계급으로 직접 진입하지는 않”으며, 권력기관이 시장 기제를 관리하고 통제하는 것을 통해 이윤의 일부를 수탈하는 구조라고 주장했다. 6 이런 연구들을 볼 때, 북한에서 화폐경제가 발전하고 그 과정에서 일부 돈주가 부유한 상인 집단으로 등장했다 할지라도 돈주라는 상인 집단이 (국가로부터) 독립적이고 다른 집단과 구분되는 독자적 계급을 형성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북한에서 돈주라는 집단이 국가로부터 독립적인 지위를 갖고 있는지가 중요한 이유는 이들이 국가에 종속돼 있지 않고 국가로부터 독립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집단인지를 분간하는 중요한 기준이기 때문이다. 즉, 북한 체제가 ‘폐쇄적 국가자본주의’에서 사적 자본을 용인하는 ‘시장을 포함한 국가자본주의’로 전환했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다.

우파를 포함한 일부 학자들은 북한 사회에서 사적 자본의 형성과 시장경제로의 이행이 민주화나 자유화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고 계급 지배의 구조가 바뀌지 않은 게걸음일 뿐이다. 그럼에도 북한 사회에서 시장화의 정도가 어떤지와 독립적인 상인 계급의 등장 여부는 북한 사회의 (근본적이지는 않을지라도 의미 있는) 변화를 평가하는 데서 중요한 지표라 할 수 있다.

이런 연구에서 두 가지 역사적 사례를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첫째는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할 때 상인의 구실을 살펴보는 것이다. 크리스 하먼은 중국에서 일찍부터 제국이 등장했지만 상인들이 자본주의 발전을 추진하지 못했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상인들과 부유한 무역가들이 완전한 자본가로 변모할 수 있는 능력을 약화시킨 중국의 특수성은 물질적인 것이었지 이데올로기적인 것이 아니었다. 중국의 상인 계급은 17세기와 18세기 유럽의 상인 계급보다 훨씬 더 국가 기구의 관료들에게 의존했다. 거대한 운하망과 관개 시설 같은 주요한 생산수단을 국가 관료가 운영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중국 상인들은 국가가 잉여의 막대한 몫을 흡수해 황궁과 고위 관리의 사치스런 생활을 유지하고 이민족을 매수하는 등 비생산적인 데 사용했는데도 국가 기구와 협력하는 수밖에 없었다.” 7

위의 인용문은 크리스 하먼이 북한의 돈주에 대해 지적한 것이라 해도 손색 없을 정도로 북한의 현실과 잘 부합한다. 일부 돈주가 부유한 상인 집단으로 부상하고 와크를 통해 시장의 독점력을 행사할지라도 이들이 국가로부터 독립해 자신의 독자적 이해관계를 갖지 않을 경우에는 의미 있는 상인 집단으로 부상했다고 판단할 수 없으며 이들을 시장화 추진 세력으로 보기도 힘들다.

북한의 시장화와 민간기업 그리고 돈주의 등장을 평가할 때 도움이 되는 또 다른 사례는 1980년대 중국의 개혁개방 과정에서 농촌 지역에 우후죽순처럼 등장한 향진기업이다. 향진기업은 중국 행정기구인 향과 진에 소속된 기업이라는 의미이며, 주로 인민공사 내에 있던 사대기업이 향진기업의 모태가 됐다. 향진기업은 형식적으로는 향진 소속 주민들의 소유(집체集體 소유)였지만, 그 일부는 지방정부의 관료가 실질적으로 소유했다. 그리고 초과이윤을 분배하는 등 경영 방식을 새롭게 도입하면서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한 노력을 8조5000억원(65억4000만 달러)을 기울였다. 그래서 중국을 연구하는 일부 학자들은 중국의 개혁개방과 시장화의 시작을 향진기업에서 찾는다.

그럼에도 향진기업들은 대부분 지방정부의 후원을 받았다. 결국 ‘시장을 포함한 국가자본주의 체제’로의 전환은 1990년대 중반 이래로 급속히 성장한 사영기업 때문이었다. 8 그리고 사영기업의 등장과 발전을 뒷받침해 준 것이 1993년의 회사법이다. 중국의 시장화가 진척되면서 향진기업은 쇠퇴했다. 1992년 5백50만 개까지 설립됐던 향진기업은 사영기업과 국유기업 등과의 경쟁으로 그 숫자는 줄어들고 각 기업의 규모는 증대했다. 이런 변화 속에서 향진기업도 형식적으로 사영기업화의 길을 걸었다.

현재 북한의 시장화 정도와 돈주 등장의 의미를 과장해서는 안 된다. 북한의 유통 부문에서 등장한 민간기업들이 시장화를 나타내는 현상인 것은 맞지만 이들과 돈주가 시장화를 주도하거나, 시장화가 크게 진전돼 국가 통제나 관리 영역을 넘어서는 듯이 말한다면 과장일 것이다.

여전히 북한에서 노동력을 포함한 생산 자원의 배분과 가격 결정이 시장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전체 경제에서 시장 부문이 차지하는 비중도 크지 않다. 그리고 돈주도 국가 관료기구에 의존해 부를 축적하기 때문에 독립적인 상업 자본가로 성장했다고 보기도 힘들다. 따라서 북한에서 시장화가 진척되더라도 매우 제한적인 수준일 뿐 아니라 제한적인 시장화 과정조차 정치적 이유로 인해 국가 관료에 의해 역전될 수도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참고 문헌

김병로 2016 《북한, 조선으로 다시 읽다》,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김병연·양문수 2012. 《북한 경제에서의 시장과 정부》, 서울대학교 통일학연구총서 16.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김어진 2017, ‘최근 20년 동안 북한식 “시장화”와 김정은 8조5000억원(65억4000만 달러)을 정권의 불안정’, 《마르크스21》 19호.

양문수 2013, ‘북한의 시장화: 추세와 구조 변화.’ 〈KDI 북한경제리뷰〉 2013년 6월호.

양문수 2014, ‘김정은 체제 출범 이후 “우리식 경제관리방법”의 모색: 현황과 평가.’ 〈KDI 북한경제리뷰〉 2014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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